이론

더글라스 크림프, 「미술관의 폐허 위에서」(1983)

eunchae_cho 2018. 6. 7. 19:52

 

더글라스 크림프, 미술관의 폐허 위에서(1983)[각주:1]

Douglas Crimp, "On the Museum's Ruins"(1983)[각주:2]




. 모더니즘의 붕괴와 미술관의 폐허: 힐튼 크레이머(Hilton Kramer)(pp.271-273)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는 미술관에서의 죽음과 부패에 관한 힐튼 크레이머(Hilton Kramer)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글을 인용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크림프에 따르면, 미술관의 죽음이 아도르노에게 그 자체의 문화적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제도의 필연적인 결과였다면, 크레이머에게는 잘못된 특정 전시로 인해 생긴 왜곡이었다. “걸작의 영원한 생명력을 믿는 크레이머에게 미술관의 삶과 죽음은 예술 작품 그 자체”, 독자성에 달려있었다. 크레이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19세기 미술에 관한 새로운 전시(installation)에서 마네와 고야의 작품과 같은 걸작이 살롱 회화와 함께 전시된 것을 비판하였으며, 모더니즘의 붕괴 때문에 이 저속한 취향의 침입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크레이머에게 이 전시는 포스트모더니스트 시각에서 이루어진 19세기 미술에 관한 포괄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크림프에 따르면, 크레이머의 분석은 예술을 일관성 있게 재현하려는 미술관의 주장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스트 미술의 실천에서 의문 사항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플랫베드(flatbet)’(pp.273-275)

 

  크림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시각 예술에 적용한 레오 스타인버그(Leo Steinberg)또 다른 기준(Other Criteria)(1968)을 인용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스타인버그는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의 광범위한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크레이머와 달리 이 명칭을 진지하게 사용하면서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예술에 내포되어 있는 변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스타인버그는 라우센버그의 회화 표면을 인쇄기에 비유하면서 플랫베드(flatbed)’라고 불렀는데, 플랫베드는 모더니스트 이전이나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공존할 수 없었던 문화적 이미지와 인공물(artifact)의 거대하고 이질적인 배열을 수용할 수 있는 표면이다.

  크림프는 푸코(Michel Foucault)고고학적접근방법과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회화 표면(surface)을 연관시키기도 한다. 라우센버그의 회화에서 드러난 포스트모더니즘에 푸코의 고고학적 접근방법에서 이야기하는 인식론에서의 변형이 존재한다면, 라우센버그의 회화 표면은 모더니스트 그림의 표면으로부터 발전되었다거나 연속된다고 말할 수 없다. 크림프는 푸코의 고고학에서 역사 속의 특정 시기에 지식의 체계, 즉 인식론에만 변형[각주:3]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새로운 사회제도와 담론도 발생하게 되는데, 이 두 요소는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이다. 크림프는 푸코의 용어를 미술에 적용하여 억압에 대한 근대적 사회제도로서의 미술관과 담론의 형성으로서의 미술사, 즉 근대 미술 담론을 위한 두 가지 전제조건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 크림프는 미술 작품의 내부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추는 크레이머와는 상이한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한 것이다.

 

 

. 모더니즘 회화와 미술관(pp.275-281)

 

  크림프는 모더니즘 회화의 시초라고 불리는 마네(Édouard Manet)의 회화와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논의를 구체화한다. 크림프에 따르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자신의 작품과 그 출처, 즉 티치아노(Tiziano)<우르비노의 비너스>와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문제화[각주:4]했지만, 티치아노의 작품은 단순한 매개체(vehicle)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라우센버그는 마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벨라스케스(Velazquez)<로크비 비너스>와 루벤스(Rubens)<몸단장하는 비너스>의 이미지를 사용한다.[각주:5] 라우센버그의 플랫베드는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 이전에는 공존할 수 없었던 문화적 이미지(벨라스케스의 <로크비 비너스>와 루벤스의 <몸단장하는 비너스>)인공물(트럭, 헬리콥터)의 거대하고 이질적인 배열을 수용할 수 있는 표면이다. 크림프는 이 이질적인 인공물이 마네의 <올랭피아>에 그려질 수 없었던 가장 중대한 원인으로 모더니즘의 회화의 표면을 구성하는 구조적 일관성(structural coherence)"을 제시한다.[각주:6]

  크림프에 따르면, 푸코는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 Flaubert)성 앙트완의 유혹(Temptation of St. Anthony)에 관한 에세이에서 무엇이 마네 회화의 특별한 논리를 구성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푸코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올랭피아>를 일컬어 최초의 미술관회화였다고 말한다. 과거의 명작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다는, 미술관의 존재와 미술관에서 얻는 특정한 현실성(particular reality)과 상호의존성의 표명으로서, 회화 그 자체의 새롭고 본질적인 관계에 관한 증명이었던 것이다. 이는 크레이머가 삶과 죽음의 조건이 미술관이나 미술관의 도구인 특정한 역사(미술사)에 있다기보다는 예술 작품 그자체, 즉 독자성에 기인(p.270)”한다고 생각한 것과는 상반된다. “‘미술관회화는 기록(archive)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정립하고자 하였으며, 그 바탕이 되는 문화의 본질적 양상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푸코에 따르면, 도서관[마네의 미술관]성 앙트완의 유혹에서 근대 문학[미술]의 촉진제(generator)”였다면,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and Pecuchet)에서는 구제할 수 없는 고전 문화의 덤핑장이었다. 필경에 염증을 느끼던 부바르와 페퀴셰는 텍스트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이들은 결국 필경이라는 본래의 업무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찾아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종이에 복사하고 분류한다. 도나토(Eugenio Donato)는 부바르와 페퀴셰의 일련의 이질적인 행위는 푸코의 도서관- 백과사전이 아니라 미술관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미술관이 수집하는 절대적인 이질성 때문이다. 도나토에 따르면, 미술관은 고고학적 인식론에 의존하고 있으며, “기원에 관한 수많은 형이상학적 가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미술관이 전시하는 일련의 이질적인 사물들은 그것이 어떻게든 일관성 있는 재현적 세계를 구성한다는 허구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정리하기와 분류하기, 즉 지식이 요구하는 체계화·동질화에 대한 무비판적인 믿음의 결과물이다. 도나토는 이 허구가 사라져 버린다면, 미술관에는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골동품만이 남게 되리라고 지적한다. 크림프는 골동품을 정리할 수 있다는, 미술관의 이질적 속성을 거부하고 동일한 체계나 계열로 축소할 수 있다는 미술관의 신념이 당대까지도 지속되었다고 말하며, 메트로폴리탄의 19세기 컬렉션의 재설치(reinstallation)를 그 증거로 삼는다. 하지만 걸작의 자명한(self-evident)” 질이라는 모더니즘 시대의 미학적 기준이 사라져서, 이 전시에서 무엇이든 허용되어버렸다는 크레이머의 주장에서, 크림프는 무엇이든 전적으로 일관성 있는 것을 재현한다는 미술관의 주장이 지닌 약점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 벽 없는 미술관의 폐허(pp.281-284)

 

  크림프는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벽 없는 미술관(Museums Without Walls)은 부바르와 페퀴셰가 패러디한 아이디어를 과장하였다고 말한다. 크림프에 따르면, 말로의 벽 없는 미술관(혹은 상상의 미술관)’은 사진 복제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이는 말로가 양식(style)의 개념 속에서 예술의 본질인 궁극적인 동질화의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으로, 이 원리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실체화되었다. 이제 사진으로 찍힐 수 있는 모든 이질적인 것들은 말로의 초미술관(super-museum)에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사진술은 현재의 광범위한 이질성을 하나의 완전한 유사성으로 환원하는 조직 장치이기도 했다.[각주:7] 말로는 이러한 예술적 본질(essence)과 양식(style)이 제공하는 지식에 대해서 부연한다. 모든 상이한 것들이 전부 컬러 도판이 되는 과정에서 사물(object)’로서의 속성은 사라지지만 양식(style)’이라는 가장 중요한 의의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다양한 사물에 대한 사진 복제에 의해 부여된 그럴듯한 통일성으로 양식이 실체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말로의 희망적인 지식은 존재론적 본질로서의 예술은 역사적 우연성 속에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크림프는 말로의 지식이 바로 학문 분야로서의 미술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속임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크림프는 말로가 사진의 복제가 아니라 사진 자체를 예술로 인정하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고 말했으며, 그로 인해 말로의 지식에 관한 가설 역시 실패한다고 부연한다. 사진이 단지 예술적 대상을 상상의 미술관에 입성하게 하는 매개체(vehicle)”였던 경우에는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말로가 사진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미술관 안으로 들여오면서, 이질성이 다시 미술관의 중심에 재건된다. 이제 사진술로도 사진으로부터 양식을 실체화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라우센버그의 농담(pp.284-286)

 

  미국 전후 시기에는 미술을 변형시키려는 사진술의 영향력에 대한 거부를 통해 모더니스트 회화에 활기가 생겼다. 그러나 라우센버그의 작품에서 사진술은 그 스스로의 파괴 속에서 회화와 공모하기 시작했다. 크림프는 라우센버그가 제작(production) 기법(콤바인 페인팅, 앗상블라주)에서 복제(reproduction) 기법(실크스크린, 드로잉 전사)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 미술은 복제 기법을 통해 작품의 아우라를 제거하고, ‘창조하는 주체의 허구성을 밝혀낸다. 크림프는 이제 미술관에 관한 담론에서 필수적이었던 독창성, 진위의 문제, 현존 개념의 기반이 무너진다고 설명한다. 크림프는 사진과 사진을 통해 미술관의 주요 권한이 된 절대적인 이질성이 라우센버그의 작품 표면 위로, 그리고 다른 더 중요하게는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까지 퍼져나간다고 보았다.[각주:8] 크림프에 따르면, 벽 없는 미술관(상상의 미술관)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 미술관이 만들어낼 담론의 확산에 도취되었던 말로의 꿈은 라우센버그에 의해 실현되었고, 결국에는 그의 농담이 되었다. 하지만 크림프는 1970년에 라우센버그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100주년 기념증명서 제작을 위해 작성한 선언문[각주:9]을 인용하며, 라우센버그 자신조차도 이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각주:10] 라우센버그 역시 인간 양심의 보고(Treasury of the conscience of man)”, “영원한 개념(Timeless in concept)”와 같은 미술관의 허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크림프는 예술작품의 사진 복제물만을 포함하고 있는 이 증명서에 미술관 관계자들이 서명했다는 사실을 짚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1. 더글라스 크림프, 「미술관의 폐허 위에서」,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눈빛, pp.271-286. [본문으로]
  2.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에 수록된 더글라스 크림프의 「미술관의 폐허 위에서」는 Douglas Crimp, "On the Museum's Ruins," The Anti-Aesthetic: Essays on Postmodern Culture(Seattle: Bay Press, 1983), pp.43-56.을 번역한 글이며, 이 글은 October, Vol.13 (Summer 1980), pp.41-57.에 실렸던 글을 교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3. “푸코의 고고학은 전통·영향·발전·변화·원천·기원과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역사적 사고의 통일성을 단절·파괴·경계·제한·변형과 같은 개념들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리고 만일 라우센버그의 플랫베드 작품이 과거의 모더니스트와의 단절과 부조화를 초래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아마 우리는 푸코가 기술한 인식론 분야에서 그러한 변형 중 한 가지를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p.274. [본문으로]
  4. 크림프는 마네가 회화 작품과 그 원천의 관계를 문제화했다는 것에 모든 미술사가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는 마네가 이전의 회화를 참고하였던 방식은 그 즉자성(literalness)과 분명성(obviousness)에서 서구 회화가 일찍이 그 원천을 활용했던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반면, 테오도르 레프(Theodore Reff)는 마네 역시 이전과 동일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며, 과거의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미술사 방법론을 모더니즘에 적용한다. p.275. [본문으로]
  5. “마네가 원작품의 포즈와 구성, 특정 세부를 그림에서 변형시켜서 복제한 반면, 라우센버그는 간단하게 원작품의 사진적 복제를 화면에 실크스크린으로 처리한다.” p.276. [본문으로]
  6. 물론, 트럭과 헬리콥터가 <올랭피아>의 제작 당시에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크림프는 설사 이 인공물들이 발명되었다고 하더라도 마네의 회화의 표면에서는 수용될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본문으로]
  7. 크림프는 카메오-채색된 원형 회화(tondo)-조각된 부조 / 귀스타브 카이유보트(Gustav Caillebotte)의 <파리-비오는 날>(1870), 로버트 라이만(Robert Ryaman)의 <윈저>(1996) 연작 사이의 관계를 예시로 들고 있다. p.281. [본문으로]
  8. “라우센버그는 <로크비 비너스>를 차용하여, <크로커스>의 표면에 모기·트럭·화살을 지닌 큐피드 그림과 함께 비너스를 실크스크린으로 처리하였다. 비너스는 <채광창>에서 헬리콥터와 맨해튼 옥상에 있는 물기둥의 반복된 이미지와 함께 또다시 두 번 등장한다. <자전거>에서는 작품 <크로커스>에서의 트럭과 <채광창>의 헬리콥터, 그리고 요트·구름·독수리와 함께 비너스가 나타난다. <뒤덮임 Ⅲ>에서는 세 명의 커닝햄 댄서 위에 비너스가 누워있으며, <돌파구>에서는 조지 워싱턴 상의 정상과 자동차 열쇠부분에 그려져있다.” p.286. [본문으로]
  9. 앞 글, p. 286p, 참조. [본문으로]
  10. 번역본에서는 라우센버그 본인조차도 이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크림프의 진술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관해 크림프의 원문을 첨부한다. “That proliferation is enacted by Rauschenberg: Malraux's dream has become Rauschenberg's joke. But, of course, not everyone gets the joke, least of all Rauschenberg himself, judging from the proclamation he composed for the Metropolitan Museum's Centennial Certificate in 1970:” (Douglas Crimp (1983), p.56.) 또한, 교정본에서는 빠진 문장이지만, 옥토버에 실렸던 버전의 각주 18번에 수록된 문장도 이해를 돕는다. “Just how little inclined to agree with my analysis of the museum Rauschenberg would be is clear from the proclamation he composed for the Metro Politan Museum's Centennial Certificate.” (Douglas Crimp (1980), p.5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