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인터넷상의 예술」

eunchae_cho 2019. 2. 4. 22:48


보리스 그로이스, 인터넷상의 예술

Boris Groys, "Art on the Internet"[각주:1]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인터넷이 예술의 생산(production)과 분배(distribution)를 위한 주된 장소가 되었다고 말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로이스에 따르면, 수많은 문화 종사자들은 이러한 인터넷으로의 전환을 해방으로 생각했다. 인터넷은 적어도 미술관이나 출판사 같은 문화 기관들보다는 덜 선별적(selective)이라고 믿어졌던 것이다. 이 전통적인 문화 기관들은 마치 신의 권능과도 같은 무조건적인 권위로 예술작품을 선택해왔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그로이스는 전통적인 문화 기관에서 인터넷으로의 이주를 통해, 예술과 문학에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서술한다. 그는 이 인터넷상의 예술에 대해 제도 비판(institutional critique)과도 명백하게 선을 긋는데, 미술관이 권력을 사용 혹은 남용하는 방식을 비판해왔던 제도비판의 방식은 이제 더는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프레이밍(framing) [pp.172-176]

 그로이스에 따르면, 문학과 미술은 허구(fiction)의 영역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그는 인터넷이 예술의 주된 매체(medium)가 되면서, 예술의 탈허구화(defictionalization)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프레이밍(framing)”이다. 프레이밍은 예술작품의 물질적이고 기술적이고 제도적인틀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술이 허구를 허구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이 프레이밍을 위장하거나 은폐해야만 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예술은 이 프레이밍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독자는 책이 물질적인 사물(material object)이라는 사실을 잊어야만 그 내러티브에 몰입할 수 있었고, 미술관의 관객은 미술관을 잊어야만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1. 아방가르드 예술 [pp.172-175]

 반면, 20세기 초반부터 대두된 아방가르드 예술은 예술의 실제적이고 물질적이며 비허구적인(nonfictional) 차원을 주제화하거나 드러내려고 했다. 전통적 예술이 프레이밍을 은폐하려고 노력했다면, 아방가르드 예술은 이 제도적이고 기술적인 프레이밍을 주제화하려고 했다. 그들은 관람자와 독자에게 이 프레이밍을 가시적이고 경험 가능하게 만들고자 했다. 이 부분에서 그로이스는 예술을 허구와의 투쟁으로 보았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인용하기도 한다. 분명 아방가르드 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하이데거는 오직 예술만이 세계의 이미지 뒤에 숨겨진 이 기술적이고 제도적인 프레이밍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로이스에 따르면, 아방가르드가 드러내고자 했던 예술의 물질적인 측면은 여전히 예술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일반적인 조건 아래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재허구화될(refictionalized) 수밖에 없었다.



2. 인터넷: 프레이밍의 변화와 예술 다큐멘테이션(documentation) [pp.175-176]

 그로이스에 따르면, 인터넷은 오프라인 현실에 참조점을 지닌 비허구적인(nonfictional) 특성에 대한 전제 하에서 기능한다. 인터넷은 정보의 매체(medium)이지만, 이 정보의 대상은 인터넷 외부, 즉 오프라인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넷상에서는 예술이 군사 계획, 관광 산업, 자본의 흐름과 같은 비허구적인 일들과 같은 장소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간다. 또한, 그로이스는 인터넷상의 예술은 이전과는 달리 고정적이고 제도적인 프레이밍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 역시 강조한다. 대신, 인터넷 사용자는 그들의 컴퓨터 혹은 휴대폰의 표면 위를 클릭하여 그들 각자의 프레임을 만든다. 이제 사용자는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 명백한 프레이밍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작품이 허구를 지시하더라도 이전처럼 여기에 몰두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로이스는 인터넷상에서 저자(author)의 허구적 텍스트[예술작품]가 실제 인물로서 작가의 정보에 통합된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예술의 물질적인 측면을 드러내고자 했던 아방가르드의 충동이 이제 인터넷을 통해 실현(realization)된 것처럼 보인다. 이때, 그로이스가 주목하는 인터넷상의 예술 재현(representation)은 바로 예술 다큐멘테이션(documentation)”이다.

 그로이스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예술인 동시에 허구적이지만, 예술 다큐멘테이션은 허구적이지 않다. 예술 다큐멘테이션은 예술을 지시하고 있지만, 예술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로이스는 예술 다큐멘테이션의 경우 예술과 달리 마음껏 재포맷과 같은 변형을 거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술 다큐멘테이션의 정체성과 복제 가능성은 실제의 외부 지시대상(referent), 즉 예술의 형식(form)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로이스는 문화 기관들이 인터넷을 자기-재현(self-representation)”의 수단으로 쓰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예를 들어, 미술관은 컬렉션의 일부를 인터넷상에 공개한다. 이는 작가 개인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대 오늘날의 작가는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 자신의 활동에 대한 다큐멘테이션을 보여준다.[각주:2]




. 동시대의 저자(author)와 관객(spectator) [pp.176-180]

1. 저자(author)와 동시대적 주체 [pp.176-178]

 그로이스는 인터넷이 저자(author)의 세계화, 즉 작가라는 개인의 세계화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그로이스가 말하는 저자는 허구적이고 권위적인(authorial) 저자, 즉 예술작품 뒤에 해석학적으로 해독해야만 하는 의도와 의미를 담는 종류의 인물이 아니다. 이 저자는 인터넷 데이터가 지시하는 오프라인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 사람으로서의 저자이다. 저자는 인터넷을 통해 예술작품을 제작할 뿐만 아니라, 표를 사거나 레스토랑을 예약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동일한 통합 공간에서 일어나며, 다른 인터넷 사용자 역시 여기에 접근할 수 있다.

 그로이스에 따르면, 본래 투명성(transparency)과 지시성(referentiality)의 공간인 인터넷에서 예술가들은 암호와 보호 시스템을 통해 이 완전한 가시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때, 동시대의 주체는 다른 사람은 모르는 암호들의 소유자, 즉 비밀들의 파수꾼이 된다. 그로이스는 이 정의가 인간 주체에 대한 아주 전통적인 정의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존재론적으로 보호되던 비밀이 이제 기술적으로 보호되는 비밀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로이스는 오늘날의 해석학자는 해커로, 동시대의 인터넷은 비밀이 상품이 되는 사이버 전쟁의 공간으로 묘사한다. 또한, 그로이스는 작가가 인터넷에 예술작품을 올리면서 얻게 되는 인터넷이 저자의 글로벌한 성공을 클릭 수, 조회수 등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2. 인터넷의 관객(spectator): 인터넷의 유한성과 감시 [pp.178-180]

 그로이스에 따르면, 인터넷의 관객은 인간도 신도 아니다. 인간의 응시(gaze)는 인터넷 전체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신의 응시(gaze)는 무한하고 인터넷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 관객은 신도 아니다. 여기서 그로이스가 강조하는 것은 인터넷의 유한성이다. 그로이스에게 인터넷은 데이터 흐름(data flows)을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이 흐름을 멈추고 뒤집기도 하는 기계에 가깝다. 그로이스는 인터넷의 물질적인 토대, 유한한 숫자의 케이블, 단말기, 컴퓨터 등을 강조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매체(medium)는 전기이고, 전기의 공급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터넷은 무한한 데이터 흐름을 뒷받침할 수 없으며, 이를 작고 추적가능하도록 분할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알고리즘]을 통해 인터넷은 모든 사용자를 감시(surveillance)에 노출시킨다. 결국, 인터넷을 읽는 시선(gaze)은 알고리즘적인 응시(gaze)가 된다.

 그로이스는 예술의 분배전시의 장소로서의 인터넷보다 작업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에 더 주목한다. 이제 예술의 생산전시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전처럼 분리된 공간에 은둔해서 작업할 수 없으며, 그의 작업 과정은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넷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가들이 인터넷의 감시에 노출된 채로 작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로이스는 인터넷이 사적으로 소유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인터넷을 통제할 수 있는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기반을 소유한 기업들은, 감시의 결과를 판매한다. 이 감시는 타겟 광고를 위한 좋은 재료가 된다. 여기서 그로이스는 고전적인 해석학의 수익화(monetization)”라는 흥미로운 용어를 사용한다. 해석학은 이제 작품 뒤에 있는 저자와 그의 의도를 파헤치려고 하기보다는, 주체에 대한 추가적인 경제적 착취를 위한 수단으로 부활한다. 주체는 인터넷 상에서 예술작품을 제작할 뿐 아니라 특정한 관심과 욕망, 필요를 지닌 인간으로 드러난다.

 


. 모던아트와 유토피아 [pp.180-185]

1. 진정한 자아(true self) [pp.180-182]

 그로이스는 인터넷을 통한 예술의 생산과 노출의 재동기화가 언뜻 긍정적으로 보였다고 설명한다. 이제 예술가는 최종적인 제품, 혹은 완성된 예술작품을 제시해야 할 부담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술을 만드는 과정의 다큐멘테이션이 이미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이스가 앞서 언급했던, 이 근본적(radical 급진적) 투명성을 거부하는 예술가에 대해서 해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그로이스는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를 언급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의 주체성은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정체성과 맞서 싸우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타인의 응시(gaze)는 우리를 대상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의 진정한 자아(true self)”를 찾을 수 있는 임시적인 부재를 필요로 했다. 이는 창조적인 작업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도 상통한다. 전통적인 창조적인 작업은 창조된 사물과 그 노동의 비동기화(desynchronization)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작가 주체는 자신의 노동을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이다.



2. 모던 아트와 유토피아 [pp.182-183]

 모던 예술가들은 주권적인 자기-정체화를 위해서 사회, 국가, 학교, 부모에 의해 부여된 정체성[명목상의 정체성]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의 사회의 지배적인 분류 체계(taxonomy)에 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이스는 그들이 진정한 자아에 대한 탐구를 대부분 포기한 채로, 자신의 명목상의 정체성을 레디-메이드로 사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술적 재전용(reappropriation), 변형, 조작 등의 형식을 통해서 명목상의, 사회적으로 성문화된 정체성으로부터의 탈정체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로이스는 모더니티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의 시대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유토피아적 기대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거나 구축하려는 프로젝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리킨다. ,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개인적인 프로젝트는 정치적인 차원을 획득하는 것이다. 또한, 이 예술적 프로젝트는 사회의 기능을 규정하는 분류 체계의 폐지를 통해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프로젝트가 되기도 한다.

 그로이스에 따르면, 전통적인 문화 기관과 이 유토피아적 욕망의 관계는 모호하다. 예를 들어, 미술관의 아카이브는 작가의 작업을 미래로 운반할 것을 약속하여, 작가에게 모든 분류 체계와 명목상의 정체성, 그리고 그의 시간(time 시대)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성취의 순간에 그 약속을 배반한다. 미래로 운반되고 난 작가의 예술작품에 작가의 명목상의 정체성이 다시 부과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술관 카탈로그에서 읽을 수 있는 예술가에 대한 분류학적 표지(marker)가 있다. 그로이스는 결국, 이 때문에 모던 아트가 미술관을 파괴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위 포스트모더니티 동안 진정한 자아와 이 자아가 드러날 수 있었던 진정한 사회에 대한 탐구는 구식이 된(obsolete)” 것으로 선언된다.

 


3. 포스트모더니티 [pp.183-185]

 그로이스는 포스트모더니티가 포스트-유토피아적인 시대가 아니라는 관점을 분명히 한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티는 주체의 명목상의 정체성에 대항하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투쟁을 급진화(radicalize 근본화)시켰다. , 예술의 생산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여 명목상의 정체성을 폐지하는 대신, 복제(reproduction)의 과정을 통해 정체성의 완전한 상실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그로이스는 더글라스 크림프를 인용하여, 복제의 개념을 통해 촉발된 포스트모던 유토피아의 풍경을 제시한다. 복제의 흐름(flows)은 미술관을 넘치게 하고, 개인의 정체성은 여기에서 익사한다. 그로이스는 이를 가리켜 기표의 무한한 유희 속에서 모든 정체성이 소멸되는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로이스는 미술관이 모던 유토피아의 묘지가 되었던 것처럼, 인터넷 역시 포스트 모던 유토피아의 실현(realization)”이 아닌 묘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인터넷에는 주체의 모든 행위가 기록되며, 관조(contemplation)의 행위조차 흔적을 남겨 추적 가능해진다. 그로이스는 이를 주체의 존재론적 자율성을 마침내 파괴하는 마지막 타격이라고 부른다. 오프라인 현실에서 관조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전통적인 존재론적 주체는 물질적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사용자와 컨텐츠 제공자는 인터넷의 맥락 안에서 비물질적인’ ‘너머의주체가 아니라, 실증적인 사람으로 행동하고 인식되는 것이다.

 


. 아카이브와 유토피아 [pp.186-188]

 그로이스에 따르면, “유토피아적 충동역사적인 분류학 체계(taxonomy)”에서 벗어나고, “역사적으로 규정된 고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과 항상 관련되어 있다. 이때, 아카이브는 주체에게 그 고유의 동시대성을 넘어서서 존속할 수 있으며, 미래에 진정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제공해왔다. 아카이브는 주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예술작품을 보존하며, 접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유토피아적(혹은 푸코의 표현을 따르자면, 헤테로토피아적) 약속은 무척 중요하다. 주체가 자신의 시대(time)와 목전의 관중과 거리를 두고, 이들을 향한 비판적 태도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로이스는 아카이브는 흔히 과거를 현재에 보존하는 수단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현재를 미래로 운반하는 기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예술과 정치를 비교했을 때 더욱 두드러지는데, 예술은 정치와 달리 장기적인(prolonged) 현존으로 남고자 한다.

 그로이스는 우리의 아카이브가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었지만, 이 아카이브에 대한 사용이 여전히 19세기의 역사주의의 전통에 머물러있다고 지적한다. , 예술가들이 탈출하고자 했던 역사적인 맥락에 그들을 사후적으로 다시 새겨 넣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이스는 우리가 점점 더 비역사주의적인 접근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제 우리는 과거로부터 개별적 현상의 역사적인 재맥락화보다는 탈맥락화와 재연(re-enactment)에 더 관심이 있다. 맥락 자체보다도 예술가들을 그들의 역사적인 맥락 밖으로 이끌어내는 유토피아적 열망에 더 흥미를 갖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인터넷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잘라내고 붙여넣는(cut-and-paste) 작업을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를 통해 아카이브에 내재되어있는 유토피아적 잠재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 Boris Groys, Ch.12 "Art on the Internet," In the Flow, Verso, 2016, pp.171-188. [본문으로]
  2. 그로이스는 오늘날 예술 다큐멘테이션이 새롭게 등장한 무언가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 다큐멘테이션은 예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그 위상이 변화하였다. "But even if the emergence of art documentation preceded the emergence of the Internet as an art medium, only the introduction of the Internet has given as a primary space for their self-representation." Ibid., p.175. [본문으로]